김찬수 제주생태문화탐사대 대장, 화산섬 ‘원령공주 이야기’ … 알타이에서 화산섬으로 건너온 식물과 언어 그리고 문화

김창수 제주생태문화탐사대 소장아베 전 일본 총리가 아이누족 후예다? 그러고 보니 튼튼하고 눈이 부신 김창수 제주생태문화탐사대장도 아이누의 후예인가? 대장님은 오늘 투어에서 알타이에서 출발한 제주어부터 다양한 제주 식물 연구까지 ‘오래된 연구’의 의미를 설명해주셨다.편백나무 숲은 귀신 공주를 찾는 여정의 절정이다.라떼는 몽골 20회, 알타이 10회 탐방을 통해 제주 식물의 기원과 경로, 무덤의 역사를 찾아다녔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 고비 사막에서 생사의 고비를 넘긴 이야기는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개인적으로도 찾아서 연구하는 것인데 언어의 오염에 관해 ‘오염된 언어’라는 책까지 동원해주셨다.김승규 해설사 이영은 선생님(왼쪽부터)시작은 제주의 행정 지명에서 비롯된다. 알타이어와 아이누어로 분리되듯이 한라산의 명칭도 신라, 백제 통치에 따라 달라진다고 한다. 한자인 차에서 유래했다는 한자어로 차는 아이누어로, 티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는 일본차와 중국차의 비교, 「다도 역수입」설은 제주 그릇과 연계되어 흥미롭다.로마제국 정복자 아티라가 한적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유럽과 붙어 있는 카스피해 쪽에서 출발한 아이누인들이 홋카이도까지 이주하는데 ‘손자 손자 대에 온다’는 말이 현대 교통을 전제로 하면 이해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격동기의 언어는 새롭게 태어난다는 말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김창수 대장은 알타이족과 비슷한 이들은 이웃 마을에 살면서 전쟁도 벌였으며 한국 서해안은 물론 함경북도, 동해안 등지에도 지명 흔적이 있다고 전했다.그 영향은 화산섬 제주까지 미친다. 항해에서 지표로 쓰이던 북두칠성은 섬에서 뒤가 좁고 앞이 넓은 마름모꼴의 제주산 담장을 남겼다고 한다. 투어 중 만난 1971년 축성된 산담 묘비(참봉, 산우…)를 보면서 섬의 변화에 놀랐다.사람 키의 3배나 자란다는 초 짚신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나무의 연식이 높아지면서 뾰족한 나무 가시가 둥글게 퇴화되어 남겨진 산북나무 이야기, 편백나무 이야기, 섬에서 가장 빨리 꽃을 피운다는 올챙이 이야기도 재미있었다.벚꽃이 피는 4월 전후로 다시 찾아와 섬 내 모든 벚꽃 이야기를 해주신다니 벌써 봄이 기다려진다. ……………….아이누연구아이누는 일본 홋카이도와 러시아 사할린, 쿠릴열도 등에 분포하는 소수민족이다.19세기 후반 메이지 이전까지만 해도 혼슈의 일본인들은 홋카이도에 사는 아이누를 이민족이라는 차별의 의미를 담아 ‘에이지’라고 불렀고, 이들이 사는 지역을 ‘에이지마’, ‘에이지’ 등으로 불렀다.17세기부터 아이누인들은 일본인(홋카이도 이남의 일본인)과의 관계에서 아이누라는 말로 자신의 민족을 나타내기 시작했다고 한다.메이지 정부는 1869년 에이지라는 뜻으로 쓰이던 에이지도 홋카이도로 명칭을 바꿨다. 오늘날 아이누인들은 스스로를 아이누어로 친척, 동족을 뜻하는 우타리라는 말로 나타내기도 한다.전통적인 아이누 사람들은 눈이 깊고 코가 통통하며 얼굴 윤곽이 뚜렷하다. 좌우 눈 간격과 눈썹과 눈 사이도 좁고 눈썹 길이도 매우 길며 대부분 이중이다. 그리고 몸과 얼굴에 털이 많다. 이처럼 아이누는 얼굴이 평평한 몽골로이드(Mongoloid)의 일반적인 외모와 다르기 때문에 한때 코카소이드(Caucasoid)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아이누 백인설’이 널리 퍼지기도 했다.아이누는 얼굴이 움푹 패여 있지만 코카소이드와 달리 광대뼈가 나오고 털도 단단한 직모가 대부분이다. 최근에는 DNA 분석 등에서 아이누와 원일본인과의 관계가 보다 구체적으로 밝혀지고 있지만, 그 결과 오늘날에는 아이누를 ‘북방에 살면서도 한랭지 적응을 하지 않은 고몽골로이드’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남방계 몽골로이드 일부가 북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여 오랫동안 오키나와와 일본 열도에 정착하면서 조몬 문화의 주역이 되었으나 북방계 몽골로이드(야요이인)에게 밀려나기 시작한 것이 후대의 일본인이며 동화되지 않은 채 동북 방면으로 옮겨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한 것이 아이누의 기원이라고 주장되고 있다.15~18세기까지만 해도 아이누인들은 홋카이도를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캄차카 반도의 남부, 북쪽으로는 사할린의 남부, 남쪽으로는 일본 혼슈의 동북부까지 넓게 분포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할린 북쪽과 흑룡강 유역, 캄차카 반도까지 교역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누는 주거 분포에 따라 홋카이도 아이누(2000년 3월에는 23,767명으로 꾸준히 줄었고), 사할린[일본명 카라프트]아이누, 크릴[일본명 쿠릴]아이누로 갈라지다. 사할린과 쿠릴열도의 아이누는 북방민족이나 러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아 홋카이도의 아이누와는 문화적 차이를 보이며 강제이주 등으로 오늘날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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